1942년 여름 Sweden을 출항 New York City에 기착한 SS Drottningholm호는 나찌 대학살을 피해 달아난 수백명의 절망에 빠진 유태인들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인 28살 Herbert Karl Friedrich Bahr.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미국 시민권자가 된 후 다시 Hanover 대학 교환학생으로 독일가서 공부중이었던 그에게 2차대전 개시와 함께 Gestapo가 접근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심문을 받고 재판에 서 나찌 간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난민은 스파이라는 미국의 히스테리의 전형적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이 당시 미국은 스파이에 심한 히스테리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에 침투한 "제 5열(fifth column)" 스파이, 사보타쥐 공작원들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겁니다. 1942년 2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난민을 국가 안보를 해치는 위험한 적으로 보고 미국내 일본인 수만명의 격리를 명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주재 미국 대사 William Bullitt는 파리가 함락된 이유를 난민 스파이들의 네트워크때문이라 진단했습니다. 모든 외국인은 스파이일 가능성을 의심하던 풍조에 불을 지핀거죠.
1939년 6월 독일 정기선 St. Louis호는 대부분 유태인인 승객 937명 태우고 Miami항에 진입하려 했지만 거부되었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배에 승선했던 유태인 1/4 정도는 대학살 Holocaust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전형적인 의심들이 미국 이민정책에 베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난민 문제가 두드러질수록 모든 난민은 스파이라고 박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공포심은 미국 사회에 자리 잡아 현재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거부반응이 극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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