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ceton University 부부 교수 Anne Case와 Angus Deaton은 몇 년전 미국 백인 중년 사망율이 악화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고했다. 중년의 백인 미국인들이 더 어린 나이에 죽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1940년 수명은 63살, 2010년 수명은 79살로 늘었는데 말이다.
이 부부는 최근 새 연구에서 고등학교 이하 학력자 백인 사망율이 더 증가했다는 사실을 다시 내놓았다. 대학학위 이상 백인 수명은 늘었는데. 역시 보통은 백인 사망율을 넘었던 흑인, 히스패닉들의 수명도 늘고 있지만.
보수학자 Charles Murray의 2012년 책 "Coming Apart: The State of White America. 1960-2010"도 고졸이하 백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분노한 이들이 아마 트럼프를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50살~54살 백인의 주된 사망이유는 주로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라 할 수 있는 자살, 약물과용 때문이다. 이 비율은 1990년이후 두 배로 뛰어 인구 100,000명당 80명이 되었다. 이들의 높은 사망율은 어린이와 노인층의 사망율의 호조를 상쇄, 2015년 전반적 미국의 수명율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 그럴까? 미스테리다. 이 백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판단하며, 그들은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실망과 패배를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이는 도저히 경제학적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문학에나 맏겨져야 할 질문들인 듯하다.
한 이론에 따르면 결국 이런 절망의 죽음이 상승한 것은 소득 불균형 때문이라 한다. 소득이 골고루 분포된다면 자살도, 알콜, 약물 중독에 의한 죽음도 줄어 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자기파괴적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좌절과 분노를 제거하는 법이다.
Case와 Deaton 부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지적한다. 증가하는 소득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흑인과 히스패닉들의 사망율은 낮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럽에선 더딘 경제성장과 더 심한 불균형이 더 많은 사망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도 다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대신 이 부부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려 시도한다. 그 원인은 바로 "축적적 박탈(cumulative deprivation)"이다. "낮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직장 기회들에 대한 지속적인 상황 악화(steady deterioration in job opportunities for people with low education)"다.
한번의 좌절이 다른 좌절에 이르고, 기술이 없어 임금도 낮고, 안정도 불안하다. 허접한 직장은 결혼도 못하게 만든다. 동거는 늘지만 이런 관계는 금방 무너진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남성들이 자녀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이런 인간관계는 그들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해롭다.
바로 이러한 서서이 축적적으로 쌓여진 사회적 요소들이 사망율 상승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들은 너무 깊기 때문에 이를 역전시키는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나는 이 이론들을 보면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의 꿈이 우리를 죽이고 있는가?"
미국 문화는 경제적 성공을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성과를 이루는 것을 강조해왔다. 현실에서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이 성공의 지상명령이었다. 비록 그 꿈이 애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꿈은 분명 주택소유, 재정적, 직업의 안정, 밝은 자녀들의 미래를 포함한다. 우리의 노력이 이런 목표들을 이루면 성공과 자기 만족감은 강해진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좌절할 때, 어메리칸 드림이 도달될 수 없을 땐 우리는 자신의 삶을 판단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이전에 했어야 할 것들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우린 우리의 실현되지 못한 소망의 인질이 되었다. 지금 더 많은 미국인들이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다. 우리가 어메리칸 드림에 천착한 것이 우리의 야망과 그리고 분노를 단정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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