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어떻게 경험도, 자격도, 품위도 없는, 돈 많은 Trump따위가 선출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거대 정당 공화당을 통채로 접수한 것이 전무후무한 획기적 사건이라 한탄합니다.
하지만 150여년 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848년 자신은 투표 한번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던 전쟁영웅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공화당 전신 휘그당(The Whig Party) 대통령 후보가 된 것입니다.
트럼프를 무시하는 민주당원 여러분, 테일러가 경험많은 전직 장관이자 상원의원이었던 Lewis Cass를 물리쳤다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공화당원들도 명심해야 합니다. 테일러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중 하나라는 점과(다른 한명 공화당 대통령은 부시), 더 심각한 사실은 그가 선출되고 몇 년 내 휘그당은 분열로 해산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재커리 테일러는 1784년 남부 부농 아들로 태어나 23살 장교직을 얻었습니다. 1812년 2차 영국과의 전쟁시 중대장으로 공을 세웠습니다. Second Seminole War에서선 the Battle of Okeechobee에서 승리해 “Old Rough and Ready”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그는 항상 전투들로 닳은 군복을 입고 다녔고 농부 밀집 모자를 써 장군이라기 보다는 시장에 달걀 팔러 나온 농부처럼 보였습니다.
그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것은 Mexican-American War(1846)에서 소장으로 Palo Alto, Resaca de la Palma 두 전투에서 승리했고, the Battle of Buena Vista에선 4배 우세한 멕시코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그는 전국적으로 국부 와싱턴 장군에 버금가는 칭송과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처음엔 대통령출마 제안에 주저했습니다. 아내도 아프고, 전쟁 승리들로 얻어낸 전리품, 그리고 Kentucky, Louisiana, Mississippi에 퍼져 있는 많은 땅과 노예들을 관리하는 일에 더 바빴습니다. 그는 당시 미국 최고 부자중 한 사람이었죠.
하지만 국민간의 인기와 열기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의 후보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후보로 지명된다"는 조건하에 나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당파임을 자랑했고 자신을 양당을 넘어서는 초당적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노예제들 당파적 견해등을 밝히지 않고 정책성 모호성을 무기로 하면서 후보로 뛰었습니다.
정치가이자 후에 대통령이 되는 앤드류 잭슨 ( Andrew Jackson)의 대통령권한 확대를 혐오했던 남부 보수주의자와 북부 산업가들간의 어색한 결합으로 1830년대 만들어진 휘그당은 대통령선거 전에 벌인 미국/ 멕시코와의 전쟁을 대통령권한의 지나친 확대의 파국적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민주당 대통령 James K. Polk에 대한 국민의 혐오가 깊어 1846년 중간선거에서 휘그당은 국회과반을 차지했습니다.
국회를 장악한 휘그당은 전쟁 영웅 테일러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자신들이 애국자임을 과시하려 했죠.
문제는 몇몇의 주요 휘그당원들은 그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당증도 없고, 거칠고,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겁니다. Daniel Webster(상원의원, 국무부장관):"40년동안 투표 한번 해보지도 않은 무식쟁이 개척군인." Thomas Corwin(상원의원):"40년동안 숲에서 자고 지내면서 자기 종아리 근육이나 키운 친구"라고 비꼴 정도였습니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 Holman Hamilton: "역사상 가장 이상한 후보자중 한 명으로 공직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진지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니!"라고 평했지요.
하지만 그는 모두를 이기면서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현대의 트럼프식으로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을 초월해서 이겼다. 와싱턴 대통령이후 미국에서 볼 수 없었던 절대적인 나의 정직함, 진실의 승리이다."
그의 이런 지명에 환멸을 느낀 일부 휘그당원들은 당의 원칙들이 훼손되었다 생각했습니다. 당은 이 품격없는 지도자에 대한 강령초안도 마련하지 못했고, the New York Tribune의 Horace Greeley는 1848몀 공화당 전당대회를 "휘그당 원칙들의 도살장(a slaughterhouse of Whig principles)"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대통령 되는 정치적 갈등과 분열은 그가 우유와 딸기를 실컷 먹고 의문의 죽음을 맞는 1850년 어느 날을 절정으로 하면서(부통령 Millard Fillmore가 계승) 1854년 휘그당(1833 시작)은 분해되게 됩니다. 나중 휘그 주요 세력은 Lincoln(1861–65)하에서 공화당으로 흡수되었습니다.
결국 1848년 대통령선거에선 막강한 민주당 후보 Cass를 물리치고 휘그당의 테일러가 겨우 이겼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싸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휘그당 마지막 대통령이 된 것이죠.
휘그당 지지세력의 주요 기반인 남부 노예파들도 그의 노예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The Compromise of 1850"에 실망했고 휘그당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공화당이여, 트럼프 지지를 하지 않고 있는 공화당 가치를 중시하는 양심있는 "Conscience Republicans”의 반발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자칫 1850년대처럼 공화당도 내부 분열로 훅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안철수, 반기문씨등 저쪽에서 정치판에 "쑥 들어" 온 "쌩 000들," 여러분들 항상 조심하세요. 경험많은 탐욕 강한 이쪽 정치꾼들, 쌩 또라이들보다 더 못한 법입니다.